아래에 기록된 글은 漢南大學校 이필영 교수의 글입니다.

"초원의 대서사시 - 몽골 유목문화" (The legacy of  the steppe - Mongolian ,nomadic culture)라는 책에 실린 글을 보고, 좋은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어 몽골스쿨 회원님들께 도움이 될 것같아 전문을 인용
합니다.  글이 좀 길지만 읽어 보시면 한.몽 민족문화를 이해하시는데 큰 도움이되실 겁니다.                                                                    ......... [편집자 주]


[1]
   
13~14세기에 걸친 몽골의 고려에 대한 침략과 지배 이후로부터 20세기 마지막 시기에 이르기 까지 한국과 몽골은 그 교류가 거의 차단된 상태에서 각기 역사를 전개 시켜왔다. 특히 양국의 현대사에 있어서는, 한국이 일제강점시기를 거쳐 남북 분단 속에서 현대를 살고 있다면, 몽골은 신해혁명(1911)을 계기로 청조의 지배에서 벗어난 후 소련의 지원 아래 몽골 인민공화국 시기를 보냈다. 그리고 약 10년전부터 일기 시작한 사회주의 쇠퇴와 민주화 물결을 타고 마침내 1992년에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몽골국을 성립시켰다.

한국과 몽골이 다시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약 6-7백년이라는 엄청난 시간적 공백을 지나고 나서야 가능했다. 불과 10여년 전의 일이었다. 일부의 한국인이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하여 몽골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향속에서 한국과 몽골 1990년 3월 마침내 정식으로 수교하기에 이르렀고, 그 이후 몽골에 관심있는 한국의 언론인, 방송인, 학자, 유학생, 사업가, 선교사 등이 앞다투어 초원의 나라 몽골을 방문했다.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는 여러 신문과 방송에서 경쟁적으로 몽골을 한국에 알리기 시작했고, 또한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언론사들과 연계하여 꿈에 그리던 몽골을 탐사하고 그에 대한 글들을 발표하였다. 일부 국어학자, 역사학자, 고고학자, 민속학자들이 몽골학회를 조직한 것도 그즈음의 일이다. 한마디로 몽골 붐(boom)이 일기 시작했고,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도 대단했다.

당시 한국과 몽골의 재회(再會)는 비정치적인 측면에서 보면 다소 흥분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몽골보다는 한국에서 그러했다.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전혀 교류할 수 없었던 소련, 몽골, 중국 등 사회주의 민족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욕구, 붕괴하여 과도기에 처해있는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호기심, 오랜 세월 외부 세계와 차단되어 신비를 간직한 듯이 보이는 초원의 나라에 대한 동경(憧憬)등을 배경으로 하고, 여기에 한국인이 몽골에 대하여 지닌 강한 문화적 향수(鄕愁)가 발휘되는 가운데, 한국은 몽골을 감격적으로 만났다.

한국인들은 대체로 북아시아 지역의 종족과 문화에 원초적으로 깊이 연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초등학교 교육으로부터 한국인은 몽골로이드(Mongoloid)계통이라고 배워왔기 때문에, 북아시아 여러 종족중에서도 몽골은 한국인의 조상, 또는 형제라고 하는 동족(同族)의식이 팽배해 있다. 그래서 몽골 사람에게는 과거 중세 시기에 약 100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그 침략과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개는 강한 호감(好感)을 나타낸다. 이 시기 한.몽 관계를 '사돈'이란 낱말로 표현하는 경우도 있다. 더욱이 한국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동향(同鄕) 사람에 대한 유별난 우대(優待)나 우의(友誼)가 국외로는 몽골 사람에게 투사된것이로 보인다. 또한 한국의 선사 및 초기 고대 문화는, 중국 문화와 깊은 관계속에서 역사를 전개시켰던 삼국시대 이전에, 이미 북아시아로 부터의 주민 이동 및 교류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북아시아는 한국 문화의 뿌리라는 관념도 보편화되어 있다.

중학교 국사 교과서(1997년, 교육부)에는 "우리 민족은 한반도와 만주 지역을 생활 터전으로 삼아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워 왔다. 이 지역에서 일찍부터 살기 시작한 우리 민족은 몽고인종에 속하는 한민족으로, 알타이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며 오늘에 이르렀다"고 쓰여있다.

또한 고등학교 국사교과서(1983년, 문교부)에는 "우리 민족은 인종상으로는 황인종에 속하고, 언어학상으로는 알타이 어계에 속한다."고 하고,"(신석기 시대) 빗살 무늬 토기를 만들어 쓰던 사람들은 시베리아, 몽고 지역의 신석기 문화를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각지에 문화를 발전시켰다."고 적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 청동기는 아연이 함유된 것도 있는 점과 장식으로 스키토 시베리언 계통의 동물 문양을 즐겨 쓴 점으로 보아, 중국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기보다는 북방 계통의 것을 받다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하고 있다.

곧 '몽고인종'이란 낱말과, 몽골 서부에 위치한 '알타이'산맥, '북방 계통'의 신석기. 청동기 문화의 영향 등은 우리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몽골에 대한 문화적 향수에 잠기게 한다.

물론 교과서의 몽고인종을 단순히 13세기나 현재의 몽골인으로 오해하는 경향은 있었지만, 아무튼 몽골로 떠나는 언론인, 방송인, 국어학.역사학.민속학 등 연구자들도 이미 이러한 전이해(前理解)에 심취하였고, 또한 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감수하고 몽골 탐사를 감행하였다. 이러한 전이해가 전혀 잘못된 것만은 아니지만, 항상 옳지 만도 않았다. 때로는 몽골을 한국 문화의 모태로 까지 생각을 확대해 가는 분위기도 있었다. 한국의 몽골 문화이해, 특히 민속 연구에서는 과학적 차원이 아니라 일정부분 감정적 측면에서 접근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몽골로 떠나기 전이나 그곳에서 현지조사를 하거나, 그들은 늘 몽골에서 한국 문화의 원형 또는 민속의 유사성을 찾으려고 애썼다. 가령 "이번 몽고 민속조사를 통해 서낭당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생각을 했다."(임동권,1992-?.202-1)든지, "몽골신화속에 우리의 신화소(神話素)가 얼마만큼 용해되어있는 가, 또 나아가 그들의 문화속에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문화속에 그들의 삶이 상호 어떻게 작용하였고 계승되어 왔는 가에 역점을 두기로 한다"(김선풍, 1998.6.), "몽골속에 감춰진 우리 조상들의 뿌리를 더 깊이 찾아보고 싶다."(신현덕, 1997.책머리에.), "몽골에서 민속학도로서 보고싶은 것은 많았다. 같은 인종이라면 원래가 같은 뿌리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에 원류가 같을 것이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중에서 오보와 석장승, 조우문화(鳥羽文化), 마문화(馬文化)등에서 비교민속학적 접근이 가능하리라 생각되었다."(임동권, 1998.212.), "몽골 문화는 우리와 유사한 기층문화(基層文化)가 많다.우리를 넓은 의미에서 몽골족이라 하고, 또 우리 역사에서 북방족이 남진해서 나라를 이루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문화의 원류를 찾는데 있어 몽골은 점점 중요시되어야 한다."(임동권,1998.220-1.),"어느 것이 제주도의 것이고 몽골이 것인지. 내눈에는 그저 똑같은 것으로만 보였다. 그저 놀랐을 뿐이다."는 등의 주장이 그러한 사례에 해당한다.

한국 문화의 '원형'이나 '원류'를 韓.蒙 민속의 유사성으로부터 해석하려는 안목은 몽골에서 한국과 다른 문화는 보이지 않게 한 것 같다. 오로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한국 문화와 낯설지 않은 몽골 문화를 느끼고 찾으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한국 문화의 원류를 규명하기 위하여 한.몽 민속의 유사성을 찾으려고 했다. 그리고 몽골에서 발견된 유사한 민속은 대개는 한국 민속의 원형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이러한 학술 활동자체도 과학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고 진지하며 오랜 시간 궁리(窮理)하며 진행된 것이 거의 아니고, 일부는 신문과 방송을 의식해서 아직은 불확실하고 위험하거나 때로는 아주 터무니없는 지식들이 생산되기도 했다. 이 점은 순수한 학술 탐사 경우에도 일부 적용된다. 심한 경우는 약 2주(周)간의 현지조사를 마치고 한권의 몽골민속 입문서가 출판되는 경우도 있었다.

[2]
   
이상과 같은 학문 과정을 통하여 지적되어 온 한.몽 민속의 대표적 유사성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몽골 샤마니즘과 무속 ,오보와 서낭당(때로는 성황당이라고도 표기), 훈촐로와 돌하루방(주채역,1992.), 샤만 후보자의 나무인 솔로모드와 솟대(色音,1991.322.), 한국의 장승과 내몽골 촌락의 수호신 고목(古木)인 샹싱(색음, 1991,310.),칭기스칸의 10대조인 보포차르의 어머니가 빛을 받아 세 아들을 낳았다는 신화와 부여.고구려의 동명.주몽 신화, 몽골과 한국이 설화에서 보이는 유사성, 곧 '사구국(沙丘國)'과 '나무꾼과 선녀'.'황금매'와 '흥부와 놀부'.'여우와 토끼'와 '범과 토끼'등에서 보이는 모티브(주채혁, 1984,10-11.), 또한 '미하친 이야기'와'여우누이', '우루(雨漏)의 무서움'과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 '쥐의 지혜'와 '까치의 보은(報恩)'(최인학, 1997.)(한.몽간의 설화 교류에 대해서는 일찍이 손진태도 지적한 바 있다. 손진태,1947.참조), 장치기. 실뜨기.고누. 공기놀이.자치기.굴렁쇠 굴리기, 가위.바위.보.씨름, 몽골인들의 식탁에 자주 오르는 신선로, 몽골 여인네들이 즐겨 쓰는 머리 수건, 음식 먹기 전에 귀신에게 먼저 바치는 의례인 고수레, 신부의 머리장식인 도투락 댕기, 돌잡이, 신방엿보기, 신랑다루기, 시어머니가 도끼를 신부 옷에 채워주는 풍속, 재래식 바느질 도구의 하나인 인두, 매사냥, '아르히'와 '소주(燒酒)', 흰색 숭배, 설렁탕과 슐(몽골어로 국이나 탕의 뜻), 제주도 가옥에서 대문 구실을 하는 정낭과 몽골의 셔낭, 고탈이란 가죽 신발과 고구려 가죽 신발(김광언,1993.),신부 치장에 있어서 연지, 몽골어에서 유래된 낱말인 연지와 단군(檀君)(김기선,1995.),몽골어의 쌍갈래 길에서 손바닥에 침을 뱉어 갈길 정하기(최기호,1995.299.),몽골과 고구려가 모두 활쏘기, 말타기,씨름을 즐기는 사실 등이 한.몽 민속의 비교에서 보이는 유사성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한편 "머리에 새깃을 꽂는 고구려와 백제의 풍속은 몽골과 같은 유형에 속하고, 변한과 진한에서 죽은 사람을 새의 큰 깃에 실어 보냈다는 것은 영혼의 하늘 운반을 기대하는 티베트에 있어서의 조장(鳥葬)과 같은 우주관에 의한 것임을 알수 있다."(임동권, 1992.194.)고 하고, 이어서"이번 영해에 있어서 하나의 수확은 우리 민족으 조장(鳥葬) 풍속과 꿩의 깃이 두드러진 것은 우리의 민속과 관련시킬 수 있다. 우리 한민족이 북쪽에서 남으로 이동해 왔다고 하는데 북에 있었던 조오(鳥羽)민소, 특히 꿩의 풍속도 민족이동과 함께 전파된 것으로 해석된다. 다시 말해 꿩 민속의 원류를 만주나 몽골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임동권, 1992.195-8.)라고 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보이는 '-以大鳥羽送死其意慾使死者飛揚-'과 머리의 새깃 장식, 꿩 민속의 기원을 몽골에서 찾았다.

오보와 오보제와 관련해서도,"(그것이) 한국의 돌탑, 달집, 대동굿과 매우 유사한 면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한국의 돌탑과 제의는 몽골의 오보와 오보제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정월 대보름에 티우는 달집은 그 형태가 몽골의 보르가슨 오보나 흉노의 용성(龍城)을 유추시키게 한다. 또 참가자들이 제물을 가지고와 신의 축복을 받은 뒤 연회를 베푸는 오보제는 한국의 대동굿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여졌다."(박원길,1998.145.)고 하고, "특히 몽골군이 주둔했던 제주도의 돌탑은 몽골의 오보와 같이 돌탑의 꼭대기에 나무를 꽂는 구조적인 일치까지 보이고 있다"(박원길,1998.95.)고 하여, 오보가 한국의 마을신앙과 두루 연계되어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체형(體形) 및 인성(人性)에 있어서도 한.몽 사이에는 매우 친연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곧 "몽골 노인이 피워 문 곰방대와 주름진 얼굴에서 한국인의 정감을 느낄수 있다."(조선일보사, 1993.화보.)든지,"표적을 겨눈 노인의 진지한 표정이 마치 우리 할아버지처럼 정겹다"(최서면,1990.화보.)든지 하는 표현을 흔히 접할 수 있다.

또한 "몽골인들이 얼굴을 보면 이웃집 사람같아 정다웠고, 소풍 나온 국민학교 학생들과 함께 놀고 사진을 찍으면서 결코 남이 아닌 우리 시골 아이들과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임동권,1998.221.)고 하고, "몽골 어린이의 반점(斑點)에서 우리와 같은 핏줄임을 확인했다."(조선일보사, 1993.화보.)고도 했다. 그리고 "몽골인들은 우리와 모습이 비슷할뿐더러 기질 또한 비슷하다. 특히 몽골인들은 술마시며 떠들고 농담을 섞어서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최길성,1993,?.206..)든지, 그밖에도 "한.몽 양 사회인들은 술과 춤을 바탕으로 한 샤마니즘 때문인지 기질적으로 매우 비슷하다. 양국인들은 술에 쉽게 취하듯 사람과 사람과의 교섭과 신과의 교섭도 도취성을 고조시켜 교제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당히 감동하기 쉽고 매우 감상적이다.그들은 술을 내어 손님을 접대하기 좋아하고 또 자신을 쉽게 개방한다. 우리들과 단순히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라 국민 기질 또한 비슷하다. 차를 빨리 달리는 것만 보아도 너무나 비슷하다."(최길성, 1993-?-160.)고 소개한다.

다음과 같은 공통성도 지적된다. 곧 몽골의 봉사혼(奉仕婚)과 한국의 데릴사위 제도 몽골에서 혼례시 부르는 문답가(問答歌)와 동상례(東床禮)(김선풍-?-1992.56.), 몽골인이 좋아하는 삼(三)이란 숫자와 한국의 단군신화에 보이는 삼위태백(三危太白).천부인(天符印) 세 개.솔도삼천(率徒三千)등'(김선풍,1992-?.66.),(오보의) 기(旗)와 솟대 (임동권,1992.217.),춤에서 사용하는 빨간 천과 한국의 황토, 팥, 피묻은 속곳(정병호,1992-?.234.),몽골 샤먼의 진맥(診脈)과 한의학의 진맥(정병호,1992.?.253),몽골 오브위에 올려진 쇠붙이나 솥단지와 신라의 설탈해 설화(김선풍,1992-?.78.)등도 양 문화의 유사성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유사성에 대하여 연구자들은 대체로 "비슷한 것을 들자면 한이 없다.","오보에서 서낭당의 원류를 찾았다는 신념같은 것을 느꼈다.","몽골인들 생활 곳곳에서 발견되는 우리와의 문화적인 유사성은 조사단을 자주 놀라게 했다.", (나는 이 방면에 깊은 지식은 없지만, 양자의 민속이)대번에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많은 생각들이 나를 흥분시켰다"등의 감격스러운 어조로 표현했다.

이상에서 한.몽 민속의 유사성들을 열거해 보였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산만하고 단편적인 외형상의 유사성에 대한 지적에 머물고 있다. 그중에서 조차 한.몽간의 직접적 문화 교류에 의한 결과로 인정되는 사항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일부는 전혀 동의할 수 없는 항목들도 있다. 이는 한.몽 민속의 비교가 양자의 민속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오랜 시간 천착(穿鑿)하고 궁리(窮理)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몽골에 대한 문화적 향수와 한국 민속의 원형이 몽골에 있다는 통념(通念), 그리고 1990년대 전후의 몽골 붐속에서 다소는 쉽고 안이하게 몽골의 민속을 이해하고, 그것에서 한국 민속의 원형을 발견하고자 했던 데에서 비롯된 것 같다. 물론 한.몽 비교민속에 대하여 민속에 대햐여 학술논문 보다는 저널리즘이 앞서간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3]  
    극히 일부의 연구성과를 제외하면, 한.몽 민속의 비교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바는 실제로 거의 없다. 또한 양자의 비교를 정면으로 다룬 연구라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그 기본적인 접근 태도와 방법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앞서 지적한대로 한국에서 몽골학이 시작된 최근 10여년 동안은 대개의 경우 한.몽 문화에 대한 일정한 고정관념과 선입견 속에서 몽골 기행(紀行)이 이루어지고, 여기서 한국 민속과 직.간접적으로 비슷한 형태와 내용이 찾아지면, 단편적으로 유사성을 지적하고, 그 유사성에 한국 민속의 원류(또는 '뿌리'라고 표현도 되는)나 교류 관계가 찾아졌다고 판단했다.
비교 연구로서 유사성 찾기에만 거의 무의식적으로 진력했기 때문에, 양자의 차이점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은 것 같다. 아무리 사물은 보고자하는대로 존재한다지만, 찾고 싶은 유사성만 보일 뿐 다른 점은 애초에 관심도 없어 보였다. 이런 점에서 한.몽 민속의 비교연구는 유사성에만 집중된 잘못된 것이었다.

양자의 민속을 총체적 시각(holism)에서 보면(전경수,1984.191-2.),서로 많이 다른 한.몽 민속에 대해서는 거의 누구도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유사성만큼 이나 차이점을 해명하는 일도 중요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몽 음악의 관계성에 대한 다음의 지적은 다른 민속의 비교연구 시각에도 매우 시사하는 바가 많다.

"한국음악과 몽골음악 중에서 유사점이 어디에 있을까 생각해보기는 하지만 쉽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가상해서 지금부터 몇 백년 혹은 1천년전에 유사한 것이 있었다 치더라도 오랜 세월의 흐름에 따라 각기 변한 것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음계의 유사성을 애기하기도 하는데, 무반음 5음계란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그 선율 진행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쉽게 속단하기 어렵다.

간혹 특정한 몇 개의 노래들이 선율적으로 비슷하게 들릴지라도 더 많은 노래들이 다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훨씬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몽골의 노래중에는 우리나라의 아리랑과 언뜻 들어서 비슷한 점이 있는 것도 있고 몽골 여인들의 긴 노래 중에는 우리나라 제주도의 홍애기 소리 등과 그 창법이 비슷한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제주도의 민요를 몽골 민요에서 옮겨온 것이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권오성,1992.27-8.)

한.몽 민속 사이에는 일정 부분 분명히 유사성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유사성은 반드시 몽골의 영향(또는 전파)이나 몽골과의 교류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몽골 민속이 한국 민속의 원형(原形)이나 원류(源流)라는 생각은 사실과도 다르지만, 양국의 민속 이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몽 민속이 지니는 유사성은 두 차원의 시대(時代)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곧 선사 및 초기 고대에 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공유(共有)하고 있던 문화와 13.14세기에 이루어진 몽골의 강권(强權)에 의한 문화접변(文化接變) 때문에, 한.몽은 일정 부분 유사한 민속 문화를 지니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북아시아 샤마니즘의 문화파동으로 설명되는 '샤마니즘의 공유'로 인하여(이필영,1991.9.39.), 몽골 샤마니즘과 한국 무속이 친연성(親緣性)을 지니게 되고, 그리고 서로 다른 자연 및 역사 환경에 조응하여 양자의 샤마니즘은 서로 다른 형태와 내용, 기능을 갖는 샤마니즘으로 전개되었다.(이필영,1979.)곧 유사성안에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샤마니즘으로 형성된 것이다. 오보와 서낭당의 유사성 문제도 그 같은 형성 및 전개 과정에서 설명할 수 있다.

우리는 한.몽 문화를 이해할 때, 적어도 13세기의 몽고풍이나 고려양과 같은 문화접촉을 제외한다면, '영향(inrluence)'이나 '전파(diffusion)'보다는 '문화의 공유(shaning)'에 비중을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같이 지니고 있었던 문화가 서로 다른 자연 및 역사환경에서 어떻게 우리 나름대로 '재해석(reinterpretation)'되어 수용되는지에 관심을 모아야 할 것이다. 한.몽 민속 연구를 원형(原形)이나 원류(源流) 찾기에 초점을 두는 일은 온당(穩當)하지 않은 것 같다. 한국의 무속과 시베리아 샤마니즘 사이에 일부 유사성이 발견된다 하여 무속을 시베리아 샤마니즘에서 유래하였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무리한 논리의 비약(飛躍)이 된다.(이정재, 1997.469470.)이 처럼 한.몽 민속사이에 유사성이 이있다 해도 그것이 곧 한국민속의 몽골 기원을 뜻하지 않는다. 또한 한국 민속의 원형이나 원류가 몽골에 있음도 의미하지 않는다. 원형(原形)은 글자그대로 원래의 모양, 곧 처음 생긴 대로의 모습이면서, 아울러 진화하지 않은 원시의 형태를 가리킨다. 원류는 흐르는 물의 근원,곧 사물이 생기는 근원을 일컫는 말이다. 문화에 있어서 원형이나 원류를 규명하기도 어렵지만, 한.몽 민속 사이에 존재하는 유사성은 다른 북아시아 전역에서도 대체로 찾아진다.

또 하나의 차원은 13-14세기 몽골이 고려 침략과 지배하에 이루어진 '강압에 의한 문화접변'이다. 몽고풍(蒙古風)과 고려양(高麗樣)이 바로 그러한 예이다. 원은 고려에 대하여 그들의 법속까지 따르도록 하였다. 고려와 원 사이에는 인적.물적교류가 활발해져 그들의 풍습이 고려로 들어오고 반대로 고려의 풍습도 원에 영향을 주었다. (김위현, 1994.)그러나 이는 단지 문화접변에 머문 것이 아니라, 일부 혼혈(混血)까지 포함되는 사건이었다.(김창현,1997.)이렇게 한.몽 민속의 이해에는 시간에 따른 두 차원의 접근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유사성안에서 양구(또는 지역)민속의 차이점을 찾고 그 배경을 설명하는 일은 매우 긴요하다. 이 설명이 충분히 되면, 단순한 외형이 일치만으로, 유사하다든지. 그렇기 때문에 '원류'라든지, '영향'이나 '전파'가 있었다는 주장을 쉽게 하기 어려워진다.

흔히 오보를 보면 서낭당과 유사하다고 지적하지만, 이는 그 외형과 일부 의례에 국한된 유사성이다. 우선 오보와 서낭당을 둘러싼 자연환경이 다른 것을 차치하더라도, 사실 서낭당이 오보와 외형상 일치하는 것인지도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물론 비슷하기는 하지만, 서낭당 과 관련한 의례구조 와 성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비교연구에 있어서는 '상호관련된 기능적인 전체(functional whole)'속에서 부분의 문화를 보아야 한다. 곧 '오보'라는 개별적인 문화요소(culture element)만이 아니라, 오보와 기능적으로 관계되어있는 오보 문화복합(culture complex)를 서낭당 문화복합과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내관적(內觀的;emic) 관념을 무시하고 이루어지는 비교연구가 허위(虛僞)일 가능성에 대한 다음의 적절한 사례가 있다.

"이누잇과 진도인의 샤마니즘을 비교하는 연구자는 외관개념으로 개발된 샤머니즘이란 용어에 의하여 두 문화의 영적 현상을 비교할 수 있다. 그러나 내관 민속지위 차원에서 보면, 이누잇 문화에서 샤마니즘을 구성하는 영적 힘이 원천과 진도 사회에서의 그것은 판이하게 다른 양상을 보임으로써 기능적 상사(相似) 차원의 직접 비교를 어렵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누잇 사회에서 영적 힘의 원천은 수령(獸靈)이고, 진도 사회에서의 그것은 사람의 사령(死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를 무시하고 비교를 강행하면, 그 과정은 맥락을 고려하는 기능적 상사의 규칙을 위반하고 그 결과는 허위적인 것인 가능성이 커진다"(전경수,1994,132.)

한편 비교연구에 있어서는 시간성과 지역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민속도 시간에 따른 변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민속은 다른 문화의 부면에 비하여 역사 전개에 따른 변동이 비교적 완만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결코 정체성(停滯性)을 띠는 것은 아니다. 민속도 변동의 속도와 내용은 다르지만, 역사 전개에 따른 변동은 응당 본질적이다.(이필영,1996.)현재의 한국이나 몽골에서 접할 수 있는 민속은 과거 문화의 잔존(殘存)으로만 이해될 수 없다. 그것은 오늘날 '살아있는 문화'이며, 그들의 역사 전개에 각기 조응하면서 형성된 민속이다.

13세기 몽골의 오보 및 오보제와 현재의 오보 및 오보제를 동일시하는 시각은 위험하다. 현재의 오보 및 오보제는 몽골 역사 안에서 '지속과 변화'이 과정을 겪은 산물이다. 한국인이 몽골 기행에서 서낭당의 원류라 하여 놀라와 하는 오보는 과거 문화의 잔존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의 몽골에 적응하여 변화된 오보이다. 한국의 서낭당도 마찬가지 이 해선상에 있다. 오늘날의 서낭제를 목격하고, 그것을 과거 전 역사시기에 걸쳐 변함없이 치러 온 민간신앙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따라서 13세기의 몽골 민속과 현재의 한국 민속을, 그리고 한국 고대의 민속을 현재 몽골의 민속과 편의상 함부로 비교할 수는 없다. 곧 민속도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그것들을 비교할 때에는 반드시 역사적 경로도 함께 고려해야 한는 것이다. 초시간 차원의 비교연구는 무의미할 수 있다. 민속의 지역성도 고려되어야 한다. 가령 한국의 무속도 그 안에는 공통성과 함께 다양한 지역적인 편차가 존재한다. 서울.경기 지역의 무당과 박수, 호남의 단골, 제주도의 심방, 동해안 별신굿의 세습무, 충청도의 법사 등이 그러한 예이다. 굿의 방식에 따라서는 선굿과 앉은 굿으로 구분할 수도 있다.

물론 한국의 보편적인 무속 구조와 성격을 추출할 수 있더라도, 비교연구에서 지역성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된다. 몽골도 마찬가지이다. 부리야트, 호루친, 할하, 오이라트, 오르도스라는 지역 문화권을 설정할 수 있고, 여기에 경제구조에 따라서 유목, 반유목, 반농반목지역으로도 가를 수 있다. 더욱이 내몽골과 외몽골도 몽골문화라는 공통분모하에서 각기 다른 문화양상을 지닌다. 따라서 비교 대상이 되는 지역간의 편차는 반드시 감안하여야 한다. 한국과 몽골 안에서도 다시 정밀하게 관찰하면, 결코 간과하기 어려운 지역적 특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한.몽 민속이 비교연구에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고려되어야 한다. 곧 외형상의 단순 대비가 아니라, 비교적연구로 찾아진 이동성(異同性)의 배경을 설명하고, 그들 민속이 다른 문화요소들과 어떻게 상호관련되어 있는 가를 밝히는데 주력해야 한다. 예켠대 오보와 서낭당이 외형상, 그리고 약간의 의례 절차에서 유사한 면이 보인다고 하여 그 문화적 관련성만 주장하지 말고, 북아시아 전역에 퍼져있는 공통의 '돌무더기 신앙'이 몽골에서는 오보로, 한국에서는 서낭당으로 형성 전개되어간 사실을 밝히는 일이 중요하다. 한국과 몽골의 솟대 역시 외형은 거의 일치하며, 그것이 지닌 우주나무(Cosmic Tree)와 하늘새(sky-Bird)의 고대적 상징성은 유사하나, 그 의미, 성격, 기능은 엄청나게 다르다. (이필영, 1990.)이러한 차이점은 양자의 자연 및 역사환경에서 비롯한다. 몽골 샤마니즘과 한국의 무속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비교연구는 A와 B라는 두 개의 대상에 대한 정확하고 풍부한 지식과 체험에 의존해야 한다. 이중 하나에만 정통해도 곤란하며, 양자에 대한 충분한 지적 수준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 연구자의 경우는 극히 소수를 제외하면 아직 몽골의 전체 문화 속에서 몽골 민속을 이해하는 수준은 아니며, 또한 몽골 민속도 그것을 구성하는 수많은 민속요소와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일정 수준의 지식도 부족한 편이다. 여기서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한국 민속에 대한 한국인 연구자의 지식 부족 현상이다. 이는 특히 민속학 비전공자에 있어서 심하게 나타난다. 한국인이라고 하여 한국 민속이 상식으로 자연스럽게 알아지는 것이 아니다. 엄연한 학문 대상으로서의 민속도 오랜 시간 천착해서 얻어야 할 지식 체계이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한국 민속을 당연히 잘 알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하다. 비교연구는 원형, 원류를 찾거나 영향, 전파 관계를 규명하는데만 쓰이는 방법이 아니다.

한.몽 비교연구, 특히 민속 분야의 비교연구가 초기 인류학사에 있어서 스미스 학파와 같은 구실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미이라를 연구하기 위하여 이집트에 체류했던 스미스는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기술에 매료된 나머지, 이집트야말로 문명을 세계로 퍼뜨린 문명의 요람으로 굳게 믿었다.(가바리노 원저, 1994.67.)
극단적인 전파주의(傳播主義)가 한.몽 비교연구에 적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한국의 몽골학 발전에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             

Mongol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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